예전 어디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하나의 거짓말이 20개의 거짓말을 만든다.'라는 말입니다. 그 거짓말을 완성하려면 20개의 거짓말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본질의 변화는 우리에게 있어 '회개'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선 인생의 본질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누가 말씀에서 벗어 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이것을 막아 섭니다. 그 뒤에는 '거짓말'이라는 어찌보면 별것 아닌 것 하나가 숨어 '나'를 조정합니다. 언제 글에도 쓴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중 '거짓말'에 대한 것은 매우 혹독하게 교육하게 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매우 엄격하게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사이에 '속인다'는 것으로 인해 갈등이 시작되고 그 골의 깊이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보다 큰 것이 바로 '속이는' 결과의 무서움이기 때문입니다. 속이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먹은 것을 안먹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마음에는 그 당연함이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뻔히 뒷손을 하고도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장하면서 그런 행위는 더욱 대담해집니다. 어찌보면 처세에 가까울 정도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선의에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조금은 못생긴 아이에게, 아직 성별구별이 쉽지 않은 어린아이의 부모에게, 물건을 사러온 사람들에게 점원이 하는 말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남을 기분 좋게 하여 무엇인가 얻어내려하거나 관계를 유지하려는 행위 속에도 '거짓말'을 통해서 형성하기도 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쌓아온 선의의 거짓말은 어느 순간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본 것을 그대로 말하지 못했던 이유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는 것입니다. 적어도 밉다, 못생겼다라고 직절적인 표현은 피하더라도 '선의에 거짓말'이라는 범주를 활용해서 과정하거나 지나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감추는 것입니다.
먼저 죄가 들어나면 인생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이 반응은 결국 인생의 한계를 들어내게 됩니다. 오히려 의가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나 사회의 지위가 있는 사람, 존경을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왜 일까요. 아무래도 쉽게 생각해본다면 쌓아둔 그것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저는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저들의 거짓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피해는 한두사람을 떠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눈물이 나게합니다. 더욱 분통터지는 것은 그에 대한 법적인 조치는 이들의 고통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사람의 입을 막고 잠시 사람의 눈을 가린다해도 그 사실이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멀리하고 덮으려고 하는 무리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도록 유도하는 '마귀'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달콤한 유혹을 감지못하는 영적 어리석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죄를 완성하여 결국 마귀의 종노릇하게 하는 것이 '거짓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달콤한 유혹은 멀리 있거나 거대한 폭풍처럼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가 너더러 더럽다했어, 그건 아니잖아', '너도 괜찮은 사람이잖아', '누구나 그런건 다하는 거야', '다운 계약서 다하는 거잖아', '아무도 안봤는데', '잘할려고 한거잖아', '너 아니면 누가 교회를 이렇게 키우겠어' 정말 시기적절한 상황에 너무나 딱 맞는 말들을 골라 자신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인생은 거짓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가인의 역사입니다. 아니 더 올라가 사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결국 성경은 이런 인생의 본질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회개'라는 정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신의 죄의 문제를 놓고 수많은 방법으로 찾으려 했던 소위 인간적인 방법의 실패뒤에 남겨진 '회개'라는 단어를 들어 얼마나 혼돈 했습니까. 이것으로 과연 해결될 것인가. '회개'를 통해 자신의 거짓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얼마나 던졌습니까.
성경은 회개 즉시 그 죄를 사함받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회개가 천국과 같이 있음도 알려주셨습니다.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회개를 하고 나서 정말 내 죄가 바로 그자리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어떻게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책을 디밀며 이곳에 이렇게 기록했다던지 그렇게 믿는다던지 하는 여러가지 제시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은 정확히 압니다. 비록 통하는 전기를 눈으로 볼수 없다해서 감전된 상황의 변화까지 숨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온 분들에게 소정의 교육을 통해 한국의 시민으로 자격을 받았다면 그 다음 부터는 한국의 법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적절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우리의 죄된 본질이 변화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요구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좀하자에 보니 교회 다닌 다는 것이 무슨 벼슬인냥 하는 사진을 봤습니다. 누구나 저건 아니지 할 것입니다.
본질의 변화는 삶의 변화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3) 다시 말하면 본질의 변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복종할 만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기 능한 육체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자신임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정말 본질이 변화되었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 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죄값을 치렀다고 다시 목회현장에 버젓이 나타나는 목사, 주님의 십자가가 아닌 자신의 명예를 찾겠다고 하는 설치는 목사, 학력을 속이고, 개인사를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고 도대체 언제까지 속일 것입니까, 그 속이는 행위가 저들에게만 있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 속임에서 자유롭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두운 밤이면 신호등도 몰라하는 질주본능이나, 숫자를 속이는 사업자들, 아이들과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자식에게 요구하는 거짓말의 정체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그렇게 하는 행실로 나타나서 주변의 사람들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나 날때까지 그렇게 해야합니다.
어느날 속히 오실 것입니다. 수요 설교시 신00목사님은 '하나님의 추격'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추격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관련말씀
시편 7:12
-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눅13:3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잉 망하리라.
행8:22
-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행20:21
-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히6:1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