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 교단의 노회가 각각 있었다.
노회를 통해 목회자들은 자신을 길을 결정하고 그 길로 가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창6:5)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세상에 창대해짐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상상이 계속해서 악할 뿐임을 보시고(kjv)
어느 곳을 택하든 그곳의 결정은 자신에게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떤 노회는 잘못된 일을 바로 잡았다.
제명되었던 목사의 부당함을 복권하였다. 잘못을 확인하고 해벌하여 그의 명예를 찾아주었다. 그런 경우라면 대부분의 목회자는 ‘여기만 교단이야’하며 타 교단으로 갔거나 누구처럼 ‘노회탈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제명’이라는 불명예를 막았을 것이다. 또는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고 목회를 하였을 것이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그 믿음으로 증명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우리에게 또 목회자들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준 것이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제명당한지도 모를 정도로 소위 ‘수작’에 걸려 제명당했던 사유도 해벌되고 복권되었다. 이 역시 그 목사에게 자신의 명예를 찾아준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위로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어떤 강도사는 인허의 문제가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회자의 길을 포기할 수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었던 일이 있었지만 노회가 그 잘못을 인정하고 인허의 기간을 연장하는 지혜를 통해 기회를 회수하지 않았다. 이 역시 잘한 일이다.
교단과 노회 등 이런 기관이 왜 필요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우리 교회만 바로하면 되지 왜 이런 ‘쓸모없는’일에 정신과 노력을 빼앗기냐고 하는 분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교단의식’이 하나의 권위나 틀에 박힌 목사들의 정치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주님께서 교단이나 노회를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하고 지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여 믿음을 존속케하는 장치임은 틀림이 없다. 바른 신학의 체계를 고수하고 끊임없이 개혁을 해가는 역할을 감당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번 노회를 통해 작은 열매이지만 틀린 것을 바로잡고 잘못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다시 하고자 하는 것은 잘한 일인 것이다.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노회나 교단은 역할과 해야 할 일을 투명하게 해서 소속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자 없는 곳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개혁이 노회를 통과하는 즈음에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본 것이다 생각한다. 이제 우리 교단에 은혜의 비구름이 몰려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시 기다려본다.
마태복음 26장에는 두 사람의 극명한 결과가 나온다.
잘 아는 것처럼 가룟유다와 베드로다.
같이 3년을 주님의 제자로 성장해왔다. 이 3년은 제자로 수많은 경험과 영적지식을 주님께 배우고 체험했고 비밀한 것을 알기까지 나간 특별한 자리였다. 그곳에 두 사람이 같이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결과를 맞닥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다른 삶은 선택했다.
주님을 배반하고 한사람은 자살을 선택하여 비참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하고도 고통의 노예가 되지 않고 회개하는 길로 들어섰음을 잘 알고 있지만 마태복음 26장은 주님의 잡히시던 날을 이야기하고 있어 두 사람의 일은 쉽게 지나치기 쉬웠던 말씀이다.
같이 신학을 하고 같이 신학교의 밥을 먹고 배웠던 신학생들이 목회자가 되고 한 교단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큰일 앞에서 각각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것을 어제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게 될 것이다.
그곳으로 간 분들을 흠내거나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우리와 함께 하는 목회자들이 베드로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비록 자주 넘어지는 베드로였고 때론 사탄의 체질(키질)에 놓임을 당했다(눅22:31)는 주님의 말씀이나 사탄이라 칭하며 물러가라는 말까지도 받았던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였으니’
신앙의 정통을 지키고 바른 개혁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이런 마음과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 양을 치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기에 부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후에 ‘반고소’라는 진리문제로 모든 목회자가 밀까부듯 하는 키질에 모두가 테스트를 당하고 있다. 이는 주님의 섭리이다. 마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모든 목회자는 다시 자신의 목회철학을 돌아보고 주님 앞에 각각 섰고 그 답을 했다고 믿는다. 이제 다시 주님은 물어 볼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3번이나 물어 볼 것이다.
그런 후에나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번 일에 죄인임을 고백했다. 그리고 자책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비통하게 울더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열매를 보고 알 것이다. 그저 조금 비통하고 억울하고 슬프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한 회개로 나갔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룟유다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베드로가 버림을 당하지 않고 주의 종 된 자로 살았던 것을 기억해야한다. 무엇보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였으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말씀처럼 목회자들은 서로의 상처를 돌아보며 교단이 한 방향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 열매의 시작이라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파멸될 것이라’(고전 16:22) 명심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말처럼 나의 교만함이 나타나서는 안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