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이라도 흘러 몇몇의 일들은 또 묻히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묻혀가는 일들을 새롭게 끄집어 올려야 할 필요성은 없다. 거기까지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간에도 회개하지 않고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더 빨리 다가와 '멸절'이라는 단어 앞에 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 칼을 들은 적도 없다. 그들을 향해 무엇을 요구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다.
이길을 가려는 이들은 계속되는 개혁의 외침을 받으며 좁은길로 가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주님의 길을 찾고 주님의 길을 배우고 주님의 길을 가려고 한다.
물론 애굽의 삶이 약간의 고통이 있었지만 편했던 사실을 돌아보면 늘 두 마음의 충돌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자문자답하는 정도는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아직도 멀찌감치 서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손짓하고 있고 우리의 배는 점차 속도를 내고 멀어져 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들은 잠시동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말씀의 굶주림을 채우고 있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도록 우리를 잡아 당기신 권능은 잠시라도 두어서는 사람의 생각과 계략에 의해 움직일 것을 아셨기에 강권의 힘은 '떠나라'고 인도하셨다고 믿는다. 우리가 챙겨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트려놓고 보고 하셨다. '봐라 가져올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것도 사실이다.
저것도 내것이었고 이것도 내것이었잖습니까, 저분도 내 친구요 이분도 내 친구였지않습니까. 라고 물었던 질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그것이 나의 영광과 비할 것이냐', '그것이 나를 아는데 필요한 것이냐'는 답 앞에는 아무도 변명할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닾이 이제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여준 이상 야릇한 열매들은 우리로 하여금 취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멀찌감치 서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답이 생소하고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한 것이 있는데요', '아직 그들에게 기회가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돌아보고 샘을 해봐야 한다.
빚을 내어서 한 헌금이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기로 한다.
시간을 내어 자신을 드린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에게 한결 좋기 때문이다. 어찌 틀린 말이라 하겠는가.
나 역시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틀리고 맞고를 떠나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받은 적이 없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였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죽도록 아니 빚을 내어가면서 아니 그 어떤 것보다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드린 것들을 주님이 모르신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잘못 알았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할 수없는 가운데 시간을 내고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을 봉사하고 주님의 일이라고 했지만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
'내가'라는 사실 앞에 나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자신이 '가롯 유다'와 무엇 다른 것이 있을까 보이는 것이다.
주님을 같이 따르고 주님께 직접 배웠고 누구보다 비밀한 일까지 체험 했지만 주님을 대하는 나의 모습에는 '내가'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것이다.
같이 넘어지고 같이 주님께 책망을 받았고 때론 같이 주님을 부인했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주님께 붙잡힘바 된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없음을 깨달을 때 온전히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결과일 뿐이다.
눅22.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