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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17 11:42
시작57>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러나 아도 다르다.
 글쓴이 : 개혁주의
조회 : 13,259  
아침 출근 시간에 청취하는 '김창완'아저씨의 방송을 듣는다.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진솔함으로 귀를 열리게 하는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음악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은 후배들에게 제목과 같이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러나 음악인은 아도 다르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인데 일종에 말 장난같은 문구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와 선배된 자의 의도를 전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같은 소리를 내어도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고 인생의 선배로 그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듣는 이들에게도 전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음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기술적으로도 그 소리를 어떻게 내는냐에 따라서도 다르다는 이야기를 함은 물론인 것이다.
 
개혁은 바로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아'라는 소리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좋은게 좋다는 이야기나. 이정도면 괜찮지 않느냐는 이야기나,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우기는 이야기나 모두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이 기도한다 해도 결국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첫째가 '인격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걸 하면 저걸 받는 식의 '인과응보'가 아니시다는 것이다.
성격은 하나님이 인생이 아니심을 많은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테두리'안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개혁의 의미는 하나님을 바로 세우자거나, 교회를 바로 세우자거나 하는 따위의 인간 중심적 사고와 그 태도를 버리는 것 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바라보고 그분의 크심 앞에 자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보여주는 그 계시를 바로 알고자 '은혜의 수단' 앞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아', '어'는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 계시적이며 일반 계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나 윤리적인 것이나 또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을 통해서 그나마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우리에게 첫 관문과 같은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두번째로 우리는 '아'와 '아'의 구분 앞에 섰다는 사실이다. 사실 같은 소리이며 같은 의미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좁은 길'과 '넓은 길'의 갈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여주는 멸망의 길은 마치 비신자들의 삶을 나타내는 것 처럼 보인다. 사실이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길 원한다. '천성'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길이고 그 길에 '좁은 길'과 '넓은 길'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만날 길이라고 믿어버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식의 사고가 여실히 들어나는 그 갈림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길은 어떻게 '증명'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첫째는 두말할 필요없이 성경이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미 우리 인생은 성경에 대한 굳은 믿음을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으나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그 말씀의 깊이를 깨닫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 우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선배 과학자의 조언을 듣고자 한다. 그럼 그 선배 과학자는 지금의 모든 기술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알려준다해도 그것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며 모두가 알고 있다. 교회에서도 처음부터 큰일을 맡을 수가 없다, 회사에서도 처음부터 큰일을 맡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라고 그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자라나야 한다.
 
그 선배 과학자는 돌아가서 지난간 여러 서적과 그 시간을 보낼 것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길을 걸어야만 자신이 전수해줄 내용을 이해하고 더 진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있었던 과거를 돌아보고 왜 그들이 시작은 창대했으나 기억되지 않는 멸망을 가져왔는지 왜 믿음의 선배들이 이땅의 삶에 뿌리를 두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며 자신의 목숨 버리기를 아까워 하지 않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쓴 많은 글들의 첫부분은 '예수 믿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 '예수 믿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 ~ 주님 주님은 성경에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는 것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들어 섰습니다. 그 길을 갔던 수많은 '증인'들이 '어렵다'. '힘들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라고 합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같이 말하는 세상의 '아'를 구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순하며 명백한 진리 앞에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다면 그 말씀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와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수단'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굳게 잡아야 합니다.
바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그러한가 아닌가를 늘 돌아보면서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섬세한 주님의 '손'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점'치듯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지난 일들을 '말씀'에 비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어리석은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우리를 이끄시어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뜻이었다고 '테두리'를 쌓아 올리지 말고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제공하는 풍성한 성경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길이 선배님들에 말씀하신 것처럼 어렵고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알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의 소망이 모든 것을 이겨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때 우리에게 주어주신 개혁의 삶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