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 되면 꽤나 분주하다. 주일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 주일을 준비한다. 미리 준비된 주보를 정리하고 주일에 쓸 여러가지 물건을 준비한다. 무엇보다 큰 일은 강당의 바닥재를 깔고 의자를 잘 정리하는 것이 제일 큰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각각의 일들이 아주 손에 익은 듯 꽤 빠른 시간이면 내일 주일 준비를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주일 준비는 이루어진다. 대로변에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조금 빠른 시간에 여자집사님 몇분이 이일을 시작했다. 사실 '착한행실'을 보여 저들에게 알려야 함과 많은 인원이 주일에 오가기에 그에 따른 쓰레기가 주변에 많아 졌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주변시민'에게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한 것도 있다. 어찌되었든 예배당의 준비에 앞서 시작된 쓰레기 수거작업은 매주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나 역시도 지난주에 이어 여기에 동참을 하고 있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하기에 수고하시는 분들을 도와 같이하면서 들은 생각을 같이 나누고자 한다. 쓰레기를 줍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이 부담스러운것도 있지만 그 또한 잠시의 쑥스러움으로 지나갈 일이다. 이일을 하면서 드는 생각중에 제일 많은 생각은 '왜 쓰레기가 줄지 않는가'이다. 물론 답은 있다. 우리가 매일 치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일 같이 청소를 전담하시는 분도 있고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이렇게 치우는 분들도 있는데 두어번 참석하며 함께 하는 분들과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매주 쓰레기 봉투로 하나 가득 채워진다.
결국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치워도 치워도 거리는 깨끗해지질 않는 것이다. 정말 줍고 치우는 사람 따로 버리는 사람 따로 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쓰레기를 줍다보면 누가 미워지는지 미워지는 대상도 정확해진다. 일단 쓰레기를 - 특히 담배꽁초가 - 버리는 사람이 밉다. 그렇지만 더 미운 사람은 깊숙한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아무곳에 막버리는 사람은 오히려 양반인 것이다. 두어주 줍고는 이제 아예 버리는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1. 줍는 사람은 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나 역시 남들에 비해서는 안버린다 해도 버리는 사람이다. 집에서도 분리수거의 대상을 구별하지 않거나 작은 쓰레기는 차창 넘어로 버렸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줍는 사람이 되고 보니 나는 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겠다는 본질보다는 주변의 오해나 또는 '착한 척'행실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줍는 행위를 통해서 버리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한쪽에선 버리는 행동을 하면서 또 한쪽에서 줍는 행동을 한다면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이겠는가.
2. 그냥 버리는 사람과 자신을 속이는 사람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이제는 버리는 사람의 심리까지 들여다 보고 있다. 처음에는 버리는 사람이 다 나쁜 사람이라고 무턱대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무의식적으로 버리는 행위까지도 세분화해서 보인다.
2-1. 전혀 공중도덕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아무곳에나 버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있다. 대로든 화단이든 신경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이다. 자신을 중심해서 나만 괜찮다고 생각해서 버리는 사람인데 줍는 입장에서는 참 다행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곳에 버렸으니 치우기는 쉬운 경우이기 때문이다.
2-2. 그래도 생각해서 버린다고 일정한 곳에 버리는 경우이다.
이런 분들은 대개 누군가 버린 곳에 같이 버린다. '버릴 곳이 없으니 누군가 버린 곳에 모야두면 되겠지'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만 무단 투기는 똑같은 것이다. 그냥 버리나 모아둔 곳에 버리나 뭐가 다른가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합리화'가 있는 분들이다 그래도 나는 버릴 곳을 찾다가 없기에 남들이 버린 곳에 버린다고 자신을 합리화하여 '버리면 안되'는 명제를 무력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핑계가 많은 사람들이며 이런 분들 때문에 오히려 쓰레기통 주변이나 그 비슷한 곳에 더 많은 쓰레기가 있게 되는 것이다.
2-3. 아주 않좋은 경우인데 쓰레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는 것이다.
정말 줍는 입장에서 답답하기 그지 없다. 눈에 띄지 않는 곳, 팔이 닿지 않는 곳, 깊숙한 곳을 잘도 골라서 버린다. 이분들에 비하면 정말 그냥 버리는 사람은 양반인 셈이다. 이분들은 작정을 하고 버리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버릴 생각을 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버리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이번에만'하거나 '버리는건 나쁜거야 그렇지만 난 몰래 버릴꺼야' 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남에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에 자신을 담아 두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왕 버릴거라면 2-2처럼 나름 정당화하면서 버리기라도 한다면 치우기라도 쉽지 않겠는가 그런데 치우는 사람보다도 자신을 숨기는 행위가 더 크기에 몰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어쩌면 위와 같은 모습중에 하나가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다. 나면서 죄인인 우리를 사하시는 분이다. 죄인인지 조차 몰라 방종하면서 죄를 짓던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다. 승리의 모습으로 교회를 떠나지만 한주가 지나면 거리의 가득차 쓰레기 처럼 죄를 가득 채우고 다시 주님 앞으로 또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하심을 힘입어 회개하고 매주 매일 매시간을 돌아보며 항상 치우는 자세로 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합리화해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죄 짓기에 합리화 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아니 숨기면 괜찮겠지 한적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에 사로 잡혀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자신을 속이면 그 죄를 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하는 것을 돌아봐야 한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죄지음'이 '죄없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이 내주하심을 체험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 마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서야 어찌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인가.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로 의에 옷을 입음 이거늘 그 공의의 옷을 입고 어찌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인가. 죄의 양심판을 흔들어대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는데 어찌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을 속이는 행위는 바로 죄를 전염 시키는 가장 무서운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그 속삭임은 아무도 모르니 괜찮다. 증거가 없으니 괜찮다하는 속삭임으로 시작해 공동체를 죄로 물들이는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