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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23 14:04
시작 59> 늘 태도의 문제이며 그 생각의 출발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글쓴이 : 개혁주의
조회 : 11,704  
행 8:23 "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
 
지금 교회의 분리, 분열 사태는 이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셈이지만 아직도 연결은 어떤 모양으로든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서로 키재기를 하는 상황인 셈이다.
 
동업을 하다가도 서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가족간의 불화로 얼굴을 안보고 사는 경우도 있다. 친구 사이에도 그렇고 사람이 사는 사이는 여타한 인생의 문제로 '갈 라'선다. 그리고 정말 얼굴을 봐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문제가 다르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는 백성이며 죽음을 통해 '천국'이 현실이 된다.
위와 같은 사이에 있는 이들이 둘 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이 생길까. 둘다 믿음을 통해 천국을 소망했다면 그들은 천국을 향할 것인데 이 땅에서 저들은 얼굴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다. 반드시 '돌아볼 생각이' 난다는 사실이다. 그리에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분열의 상황을 걷고 있고 불과 몇백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서로 '으르렁'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육탄전을 해서 서로 자멸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미 그렇게 패가망신한 경우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두 교회 그리고 그곳에서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이 과연 먼저 말한 것과 같이 '천국'을 소망하느냐는 문제이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의 형제로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이 이곳을 '이단'화하려는 속내는 당연히 찾아 오는 수순이다.
생각해보니 같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 같고, 아니면 화해를 해야하는데 난 잘못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서로는 '으르렁' 하는 관계를 이 땅에서는 끝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국 문 앞에서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
 
모세는 그 동안의 축복의(?) 삶을 살다 어느날 자신의 동족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본다.
성경은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라고 그 장면을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난 후의 사건은 알다싶이 '살인'이며 광야로 죽음을 피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위대한 결단' 뒤에는 그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잘못이든지 잘한 일이든지 모세의 생각은 살인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는 결단의 연속에 살고 있고 크고 작은 결단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일이다.
 
석0 원로목사의 문제를 한 장로를 제명하는 일로 마무리하려고 했던 생각은 그 방향을 잃었다. 항상 그렇게 했던 입장에서는 당황했을 것이고 이 문제를 조기에 마무리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그 과정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전에는 '내 뜻대로'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조기 진화의 실패는 계속되는 '좌충수'를 두어야 하는 입장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결론적으로 지금에 와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 선에서 서로 물러선 것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세상사가 그리 호락하지 않다고 솔로몬 왕은 잠언서를 통해 '폐단'임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한 나만의 완벽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도를 하려니 '저것이-사이트- 나를 방해하고 있다' 이 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언뜻보면 말하기도 좋고 명분도 매우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봐주고 있다. 그래서 이만큼인데 잘 해보려고 하는데 저기 '이 죽은 개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짓고 있으니 이 참에 없애야 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를 지켜보면서 속마음에 '잘되면 안된다'는 저주를 빌고 있지 않는가.
바르게 하겠다는 사람도 그것을 지키겠다는 사람도 그 태도의 마음부터 바꿔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속내임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마음은 더 나아가 '이단'으로 말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나의 입장을 위해 형제를 저주하는 일이 과연 무엇을 근거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결국은 같은 길을 같다면 반드시 그 길에서 볼 수 있다는 - 왜냐하면 신앙은 한 길로 표현되며 바른 길을 간다면 만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 그 사실을 부인하려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완전한 부정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길을 -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적 고백 -  갈 수 있다는 원천적 차단을 하고 싶은 것이 '정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두 길중에 한 길을 택하는 것이며 그 중간은 없다. 조용히 택할 수 없고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 그렇게 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 27.28장도 두 길중에 택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여호수아도 유언처럼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수 24장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멜산에서의 엘리야 역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마7:13-14에서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그 길이 어떠한지 자세히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렇다고 우리는 옳은 길이고 너희는 틀린 길이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정말 큰 코 다친다. 
정말 바른 길로 가고 싶다면 바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불연듯 드는 생각'을 좇아가지 말아야 한다. 이 사이트 하나가 폐쇄된다고 해서 숨기고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생겼는가를 알아야 한다. 세상의 이론도 날이 바뀌면 없어지거나 바뀌기 마련이다. 
가말리엘의 말처럼 이것이 하나님께서 난 것이라면 어찌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도처럼 있다가 없어질 무리라면 기다려보면 되는 일인 것인데 직접 나서야 하는 이유가 결국은 자신의 '권리'라는 '명예'라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법 뒤에 숨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세상의 법을  이용하려던 무리들이 어떤 처참함을 맞보았는지를 알면서도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불나방 처럼 그곳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그 따듯함이 내것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실재로 타 죽을 때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했을 것이다. 말처럼 오늘 생각하고 오늘 지르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말 그대로 허당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닝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래도 자신들의 맞다고 여러 근거를 드려대도 되지 않을 일이다. 아합의 몰락을 통해서 그에게 솔깃하게 들렸던 이야기가 거짓 영의 역사임을 알려 주었어도 결과는 그렇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삼하 16장 5절 부터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가 등장한다.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라고 기록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분리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일이 없다. 다른 무리의 계략이었다. 수많은 설을 세우고 이제는 그 끝에선 '이단' 논리까지 퍼뜨리고 있는 입장에서 '잘못이 없다'면 그 논리는 기다리면 알게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논지를 견지해야 한다. 믿는 자의 모습은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엄청난 대가를 피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10절 "저가 저주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라고 말하면서 11절 이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그 저주가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믿음의 길로 걸어가기를 선택했다.
 
잘못이라고 하고 집사들을 제명하고 장로들을 제명했던 사실을 돌아보라. 과연 누가 어느 곳에 서 있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함께 제명을 외치며 박수 치던 일들을 어찌 잊었는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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